러브레터는 이와이 슌지의 소설 <러브레터>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이와이 슌지가 감독과 각본도 맡았다. 워낙 유명해서 하얀 눈 밭 위에서 빨간 스웨터를 입고 외치는 대표장면으로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각인된 영화였는데, 굉장히 유명한 로맨스 영화들도 그다지 감명 깊게 보지를 못한 경험이 많아서 크게 기대하지는 않고 봤다. 그러나 내 예상을 깨고 생각보다 마음을 울리는 부분들이 많았다. 풋풋하고 순수한 감정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누군가를 그저 이끌림의 감정으로 한없이 깊게 사랑하게 된 마음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에게도 추천한다.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다들 이 감정들을 느끼고 울림을 얻어갔으면 좋겠다. 근데 옛날 영화라 아무래도 이해 안 가는 부분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영화가 주는 울림으로 포용해 줄 수 있다. 밑에서부터는 스포를 주의하길 바란다.
학창 시절 풋풋한 순정
솔직히 처음 30분 정도는 굉장히 지루했다. 옛날 영화기도 하고 그다지 기대도 없어서 재미없고 지루한, 하늘로 간 사람 추억하는 로맨스 영화인가 보다 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후지이 이츠키들의 중학교 시절 회상이 나오자마자 사라지게 됐다. 한 1분 정도는 또 재미없는 뻔하고 뻔한 설정인 줄 알았는데 후지이 이츠키(남자)가 애들이 놀릴 때 참지 않고 일어나 기강을 휘어잡는 장면부터 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순간 중학교 때 교실에서 시험 끝나고 친구들과 '나의 소녀시대'와 '치아문단순적소미호'를 볼 때의 느낌이 확 왔다. 사실 '치아문단순적소미호'는 남자 주인공이 상당히 내 스타일이 아니라 잘 기억도 안 나니 차치하고, '나의 소녀시대'의 그 낭만적인 느낌이 왔다고 보면 되겠다. 너무나 클리셰 덩어리지만 그래서 더욱 맛있는 바로 그 맛이다. '나의 소녀시대'의 너무 유치한 감성은 빠져서 더욱 좋다. '너에게 닿기를'도 생각났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눈 오는 날 친구들이랑 새해맞이 종 치러 가는 에피소드를 굉장히 감명 깊게 봤는데 러브레터도 오타루의 눈 오는 풍경 하며 그 알 수 없는 간질거림과 낭만적인 분위기를 가진 것이 꼭 닮아있었다. 다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지 몰랐다. 이렇게 풋풋하고 분내 나는 감성을 담아내는 게 쉽지가 않은데 이런 감성을 다시 일깨운 것만으로 이 영화는 나에게 엄청난 수작이 되었다. 사실 맨스플레인 심각한 아키바랑 답답하고 지나치게 순종적인 히로코, 애가 쓰러졌는데 답을 알고 있으면서 굳이 질문하며 시간 끄는 할아버지, 빨리 의견 맞출 생각 안 하고 시켜도 안 할 거 시키며 효율 줄이는 엄마 등등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좀 있었는데 옛날 영화니까 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남자 주인공이 리즈시절 20초반의 엑소 오세훈을 닮았다. 보자마자 딱 오세훈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 심장을 울린 것 같다. 얼굴이 개연성이고 얼굴로 인해 이 감성이 살 수 있는 거다. 정말 배우신 감독님이다.
오타루의 낭만적인 풍경
미적 감각도 이 영화의 대표적인 감상 포인트다. 약간 뿌연 감이 있는 화질은 눈 오는 일본의 아기자기한 풍경과 잘 맞았다. 배우들의 패션도 촌스럽지 않고 그냥 일본 겨울 감성 그대로 폭신폭신 포근한 느낌이다. 히로코와 아키바가 오타루 가서 유리공예 하는 친구들을 만난 장면도 인상 깊다. 오타루 하면 유리공옌데 실제로 작업장에서 유리로 무언가를 만드는 장면은 나의 흥미를 돋웠다. 유튜브 쇼츠에서나 보던 장면인데 직접 저렇게 모양을 직접 잡아가며 수작업으로 만든다는 게 뭔가 낭만적으로 와닿는다. 물론 오타루라는 아름다운 풍경의 명소와 눈 등등의 감성이 겹쳐서 그렇게 와닿은 것 같긴 하다. 아키바가 일하던 작업장도 영화 '센과 치히로 행방불명'에 가마할아범이 일하던 보일러실을 생각나게 해서 또 뭔가 낭만스럽게 보였다. 도무지 이게 왜 낭만적인 건지 설명하기 어려운데 현대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아날로그적인 면 때문에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 나는 나이도 그렇고 딱히 그때 그 시절 향수나 그리울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감정을 가지는 것일까? 심지어 나는 직접 접해보지도 못한 것들인데 오히려 그래서 더욱 뭔가 다른 세상 같고, 미지의 것들을 소설로 접할 때 느껴지는 것처럼 가슴이 몽글몽글 해지면서 설렌다. 서양인이 오리엔탈스러운 것을 보고 굉장히 신비롭고 흥미롭다고 느끼는 것이 이와 비슷할까? 뭐든지 참 시각적인 건 중요한 것 같다. 꼭 완벽히 아름다운 게 아니더라도 분위기와 조화를 맞출 줄 아는 감각이 사람을 이끄는 것 같다. 그게 더 사람을 미치게 한다.
심금을 울리는 OST
올드보이에 이어 또 한 번 소름이 끼치는 경험을 했다. 히로코가 후지이 이츠키의 정체를 알고 그의 집 앞에서 편지를 쓰는 장면에 'A winter story'가 나왔는데 이 노래가 어릴 때부터 피아노로 치던 정말 익숙한 노래였기 때문이다. 정말로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이런 부분이 퍼스널 하게 다가올 때 내 안의 뭔가를 더 자극하는 것 같다. 이 영화의 풋풋한 감성과 겹쳐져 어릴 적 피아노 학원과 학교에서의 일화들도 떠올랐다. 그냥 머릿속 한구석에 있는 기억이었는데 이 영화 덕분에 '혹시..?' 하면서 약간의 상상력을 더해 미화시키며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즐거운 경험이다. 하지만 추억으로 남을 때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한다. 개인적인 견해로 이 영화도 후지이 이츠키(남자)가 죽었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는 거라 본다.
만약에 이 분이 살았더라면 장기적으로 파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자기가 좋아했던 사람이랑 닮은 사람을 좋아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얼굴 생김새 같은 것이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후지이 이츠키(남자)는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푸른 산호초' 노래를 부르며 후지이 이츠키(여자)를 떠올릴 정도로 그녀를 잊지 못하고 심하게 좋아했다. 결국 후이지 이츠키(남자)는 좋아하는 얼굴상이 있던 게 아니고 후지이 이츠키(여자)를 좋아하면서 닮은 히로코를 대신 사귄거다. 심지어 약혼까지 한 게 참 문제가 있다고 본다. 만약 후이지 이츠키(남자)가 시작은 닮아서 사귄 것일지라도 사귀면서 히로코 자체를 사랑하게 됐다면 인정이지만 본인은 본인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을 텐데 그럼 거절을 했어야지 히로코만 불쌍하다. 어쨌든 그래도 후이지 이츠키(남자)가 죽었기 때문에 히로코도 그를 털어낼 수 있었고, 후이지 이츠키(여자)는 학창 시절 추억을 간직할 수 있게 된 최고의 결말이라 생각한다. 물론 허구의 이야기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이야기였다면 파국이고 뭐고 일단 사람 목숨이 우선이고 파국은 늦게 찾아올 수도 있는 것이며 평생 진실을 모르고 잘 살 수도 있는 것이기에 후지이 이츠키(남자)가 죽지 않는 것이 최고다.
마무리
영화를 다보고 난 직후에는 후지이 이츠키(남자)가 그 정도로 후이지 이츠키(여자)를 좋아했으면 이사 가서 헤어졌더라도 어른돼서 다시 찾아가 보지 왜 닮은 히로코를 사귀는 거지 이해가 안 갔다. 근데 책에 그림 그려서 마음을 표현한 게 마지막 구애였던 것 같다. 후지이 이츠키(여자)가 자신이랑 커플로 엮는 것 때문에 울기도 했고 자기를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느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그렇게 소극적인 구애를 펼친 것 같다. 실제로 후지이 이츠키(여자)는 히로코가 아니었다면 후지이 이츠키(남자)를 기억도 못했을 것이라 이해가 간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적어보자면 맨 처음에 후지이 이츠키(남자) 아빠가 남들이 흉볼까 봐 바쁜 척한다는 게 이해가 안 간다. 그리고 주민등록증 사본 보내서 후지이 이츠키(남자)가 아닌 걸 알았을 텐데 히로코와 아키바는 왜 오타루로 간 것인지 모르겠다. 오타루 집에 도착해서야 여자라면서 그냥 돌아가던데 이미 민증 사본으로 알아야 되는 거 아닌가 의문이었다.
그리고 사실 눈 오는 산에서 '오겡끼데스까'를 외치는 명장면만 알고 있었어서 당연히 히로코가 메인 주인공인 줄 알았다. 그런데 후지이 이츠키(여자)가 단순히 과거 회상을 도와주는 역할이 아니라 또 다른 주인공이라 놀랐다. 심지어 둘이 같은 배우인 것도 중간에 깨달았다. 같은 사람이라 일부러 다른 캐릭터인 걸 알게 하려고 티 나게 성격을 다르게 연기한 거였다. 근데 나는 후지이 이츠키(여자) 캐릭터 연기가 조금 오글거린다고 느꼈다. 얼굴은 진중해 보이는 30대인데 하품할 때도 그렇고 지나치게 천방지축 쇼콜라 같은 연기를 해서 이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배우로 인식됐다는 점은 성공적인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궁금한 것이 극 중 등장인물들의 나이가 궁금하다. 나무위키에서는 1965년생 1984학번이라는데 개봉 연도가 1995년이니까 30살인 설정인 걸까? 액면가는 30살 정도가 맞는데 후지이 이츠키(여자)의 천방지축 한 면과 히로코가 얼굴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질투하는 장면 때문에 이 사람들 정신연령으로는 나이가 20대 초반이어야 맞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혼란스러웠다. 근데 결국 히로코의 추측이 사실이었다는 건 놀랍다. 여자의 직감이었나 보다. 나는 처음에 무슨 자기 얼굴이 남자친구와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여자애랑 닮았다는 걸로 그런 의심을 하나 싶었는데 직감을 기반으로 한 정말 날카로운 의심이었다. 편지를 읽으면서 히로코가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지 좀 슬퍼진다. 그래도 후지이 이츠키(남자)가 세상을 뜬 상황에 마음 정리를 할 수 있다는 좋은 점 하나는 있어서 다행이다.
영화 마지막 쯤 눈밭에서 잘 지내냐고, 자기는 잘 지낸다고 계속 외치며 살짝 오열하는 부분 연기는 진짜 기가 막혔다. 영화 내내 잘 지내냐고 그렇게 물어보더니.. 이전까지는 큰 감흥 없다가 여기서 그 말의 의미가 와닿아서 솔직히 같이 울었다. 울면서 후지이 이츠키(남자)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대단한 사랑이다. 병실에 누운 후지이 이츠키(여자)도 같이 잘 지내냐고 물어보는 장면이 히로코와 겹쳐서 나오는 연출 또한 정말 감명 깊었다. 관객들의 감정을 극대화시키는데 일조했다 장담한다. 히로코 캐릭터가 너무 답답하고 후지이 이츠키(남자)를 그렇게 좋아하면서 그가 간 마지막 산도 못 알아보고 아키바가 알려줘야 아나 이런 생각도 있었는데 히로코의 후지이 이츠키(남자)를 향한 마음이 저 외침으로 와닿아서 그냥 흐리게 보기로 했다. 그의 죽음을 회피해 왔던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자기를 후지이 이츠키(여자)랑 닮아서 사귄 남잔걸 알았는데도 얼마나 사랑했으면 저렇게 잘 지내냐고 목 터져라 외칠까. 그 마음이 너무 아름답고 가치 있어 보인다. 여러모로 가슴에 깊은 울림을 주는 영화다. 명작이라는 영화 보고 실망한 적도 많은데 이 영화는 두고두고 찾아보고 싶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