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에 개봉한 영화 "매트릭스"는 SF 장르에 혁명을 일으키고 대중 문화에 한 획을 그은 명작이라 할 수 있다. 획기적인 시각 효과와 관객들로 하여금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서사, 배우들의 명연기를 결합한 이 영화는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매트릭스는 현실이 AI에 의해 프로그램 되었다는 세계관을 배경으로, 그것을 발견한 해커 네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현실이 사실 조작된 것이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만큼 영화를 보고나서 생각할 거리들이 많이 생기는데, 그 중 몇 가지에 대해 내 견해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사이퍼의 선택에 대한 생각
매트릭스에서 사이퍼는 원래 빨간약을 택하고 모피어스와 함께 매트릭스 속 사람들을 해방시키려 노력했으나, 고된 싸움으로 지쳐 빨간약을 선택했던 것을 후회하고 몰랐을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등장인물이다. 이 장면을 보고 참 많은 생각이들었다. 사이퍼의 입장을 생각하면 그의 선택을 감히 나쁘다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용납해버리기엔 '힘 없는 인간들은 꼼짝없이 매트리스 속에 살아야 한다'는 AI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셈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깊은 생각 끝에 내린 결과, 나는 매트릭스의 사이퍼와 같은 선택의 상황에 놓인다고 해도 사이퍼와 같이 매트릭스 안에서의 편안한 삶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미 진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매트릭스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AI들에 의해 철저하게 감시되어 그들이 짜놓은 틀에 따라, 그들의 입맛대로, 사실상 조종당하는 노예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매트릭스 안에서 살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사이퍼도 요원들 앞에서 선택의 결정을 할 때, 스테이크를 먹으며 "이 음식이 진짜가 아니라는 건 알지만 뇌는 맛있게 느끼는데 아무렴 어떠한가, 나는 이제 모르는 게 약이라는 걸 깨달았다"며 이제 그냥 편해지고 싶다는 뉘앙스로 말한다. 사이퍼도 진실을 몰랐을 시절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 것이지 지금까지의 기억과 진실을 다 아는 채로 매트릭스 안에서 사는 건 원하지 않았다.
기억을 지우고 매트릭스 속으로 갈 수 있다면?
그렇다면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사이퍼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지 않냐고 물어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아예 매트릭스 안에서 태어나서 아무것도 모를 때면 모를까 이미 진실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매트릭스 안에서의 삶을 택하는 것 자체가 정신적으로 힘들 것 같다는 입장이다. AI와 싸워서 자유를 되찾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아예 버려버린다는 결정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사이퍼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소수의 깨어난 인간들끼리 AI와 맞서 싸우는 게 힘들다는 걸 얼마나 체감했길래 모든 걸 체념하고 그냥 AI의 세상을 해라라는 심정으로 포기를 할까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 사이퍼처럼 AI와 싸우는 고생을 안 겪어봐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이미 진실을 아는 이상 몰랐을 때로 돌아가게 해준다고 해도 그 선택을 하는 것 자체가 굴욕적이라서 최대한 AI와 싸우는 현실에서 버텨보려고 할 것 같다.
그런데 이제 AI와 싸우는 현실을 택하는 것도 전제조건이 필요하긴 하다. 뜻을 함께하는 동료들이 있고, 모피어스와 오라클이 말하는 ‘그’가 존재하거나 내가 ‘그’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아직 AI와 싸워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판단이 든다는 전제하에 현실을 선택할 것이다. 이런 전제가 없다면 이미 싸움에서 이길 승산이 없다고 체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체념을 했다면 나도 사이퍼처럼 굳이 고통 받지 않고 AI가 지배하는 세상을 인정하고 싸움을 종료하는 선택을 하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할 것 같다. 하지만 매트릭스에서 깨어난 인간은 소수 뿐이고, 내가 포기를 하고 매트릭스 안에서의 삶을 선택하여 모피어스와 동료들을 배신하는 순간 AI의 완전한 지배가 이뤄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책임감을 생각하여 사이퍼와 달리 희망을 가지고 최대한 어떻게든 현실에서 싸워보겠다는 것이다.
매트릭스 속에서의 삶은 가짜일까?
사이퍼는 트리니티와의 대화에서 현실에서 이렇게 힘들게 사는 삶이 뭐가 자유냐고 말하며 매트릭스에서의 삶은 가짜가 아닌 진짜라고 말한다. 참 어려운 주제인 것 같다. 나도 뇌가 리얼하게 느낀다는 점에서 디지털 신호로 구현한 프로그램 속이라도 그것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고 생각하고 싶다. 특히 행복이나 기쁨과 같은 감정을 느낀 것은 말이다. 우리가 VR 체험 하는 것도 사실 가짜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지 않은가? 결국 '경험'이라는 것은 진짜인데 말이다. 다만 이제 뇌에 심어진 프로그램으로 인해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경험으로 만들어낸 독자적인 자아가 아니라, 프로그램에 의해 만들어진 자아라는 점에서 가짜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매트릭스 하니까 철학자 닉 보스트럼을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사실 시뮬레이션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을 하던 게 생각난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현재 어떠한 알고리즘이라던지, 짜여진 프로그램 설정에 따라 움직이고 있으며 그저 하나의 실험군이라는 얘기가 된다. 충격적이긴 하지만, 매트릭스와 다르게 우리가 프로그램이 심어져서 통제당하는 게 아니라 진짜 그냥 시뮬레이션의 일부였다는 점에서 사실 "뭐 달라질 게 있는가?"하는 생각이다. 어쨌든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건 사실인데 말이다. 그냥 그대로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결정장애 같은 일을 겪을 때 어차피 시뮬레이션이니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며 쉽게 결정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너무 낙관적인 생각인걸까?